15세기말까지만 해도 유럽은 광활한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변방에 위치한 비교적 미미한 세력에 불과했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유럽은 역사적인 위기까지 겪었던 상태였다. 그러나 이 시기를 거치면서 유럽은 세계의 패권을 차지하는 강대한 세력이 되었다. 미미했던 유럽이 어떻게 그와 같은 발전을 했을까? 이 의문점을 해결하기 앞서 당시 세계 여러 세력들에 대한 개괄을 먼저 해보고자 한다.
모스크바 공국
20세기 무렵 초강대국의 지위를 차지하게 될 이 세력, 러시아는 아직 완전한 모습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모스크바 공국'이라고 불렸던 이 세력은 이반 3세(1462-1505)의 치세 중에 영토를 조금씩 확대해 갔다. 그는 주변의 여러 공국들을 차례로 정복하고 당시까지 리투아니아의 봉신이었던 여러 영주들에게 종주권을 강제하는 한편, 폴란드 국왕에게 자신이 '러시아의 군주'임을 인정하도록 만들었다. 이반 3세는 1480년에는 오랫동안 남러시아를 킵차크한국의 지배를 종결시켰다. 또한 비잔틴 제국 마지막 황제의 딸과 결혼한 이후에 자신을 비잔틴 황제의 계승자이자 동방 정교회 기독교 세계의 수호자를 자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스크바 공국은 아직 흑해나 발트해로 해상 진출을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 이 말은 곧 모스크바 공국이 대륙 내에 같혀 팽창의 한계를 안고 있음을 의미했다. 이후 러시아는 해양 진출을 통한 국가발전을 목표로 흑해와 발트해의 항구 도시를 획득하기 위한 투쟁을 벌였다.
오스만투르크 제국
1453년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비잔틴 제국을 무너뜨렸다. 이는 유라시아 대륙 전체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라고 평가되고 있다. 동쪽에 강력한 이슬람 제국이 등장하자, 서유럽은 전반적인 팽창의 방향을 서쪽 대서양 방면으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메흐메트 2세는 1481년에 사망하기까지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극적으로 확대시켰다. 그들의 주요 정복활동을 간략히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 남부 모레아(1460)와 트레비종드(1461) 같은 그리스 공국들을 점령
- 세르비아(1459)와 보스니아(1463) 같은 발칸 지역의 국가들을 격파
- 왈라키아(1462), 몰도바(1462), 크리미아(1475) 등지를 봉토로 만듦
- 비슷한 시기 제노바를 흑해로부터 축출하고 크림한국(1475) 속국으로 삼음
- 레스보스(1462), 카파(1475) 같은 이탈리아의 상관(商館)들을 점령
이로 인해 이 시기 유럽 지중해 동부 지역을 통해서 아시아와 접촉하던 이전 방식이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매우 힘들어졌다. 강력해진 오스만 제국은 동유럽 지역에 큰 위협이 되었다. 헝가리 평원이 오스만 제국과 직접 맞닿게 되었는데, 이는 후일 합스부르크 세력과 오스만 제국 간의 군사적 충돌로이어지게 된다.
아시아
중세 유럽인들에게 아시아는 막대한 부가 존재하는 지역이자 미지의 두려움이 혼재하는 일종의 신화의 세계로 남아 있었지만, 마르코 폴로와 같은 사례에서 보듯이 제한적인 정도로나마 여행이 가능했다. 특히 몽골 시대에 비교적 많은 소통이 이루어졌으나, 몽골 제국이 붕괴하면서 아시아와의 직접적인 교류는 어려워졌다. 유럽 상인들은 직접 아시아의 후추나 비단과 같은 사치품들의 원산지를 찾아갈 수 없었으므로 주로 아랍 상인들의 중개에 의존했다. 이런 상황에서 바다를 통해 아시아로 직접 가고자 하는 소망이 유럽의 해상 팽창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인도양 세계는 해상 무역 네트워크가 일찍부터 발달한 상태였다. 아랍 상인들은 중국 남부 지역에 대규모 거류지를 형성했고, 인도, 동남아시아, 아랍 지역, 동아프리카 등 1억 명이 넘는 인구가 인도양을 통해 소통할 수 있었다. 근대 초기에 유럽인들이 희망봉 항로를 통해 아시아로 들어오면서 두 문명권의 교류와 소통은 급격히 증가했다. 이 당시 아시아에는 안정적이고 강력한 정치 질서가 있는 제국들이 존재했고, 상업 네트워크도 잘 발달되어 있었다. 따라서 유럽인들은 아메리카나 아프리카에서처럼 쉽게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었고, 일부 지역에 거점을 세우고 기존부터 존재하던 아시아 시장에 편입하고자 노력했다.
아프리카
모로코에서 이집트까지의 지중해 연안 지역인 '백아프리카(White Africa)'는 이슬람 지역이었으며 오랫동안 유럽과 교역 관계를 유지해왔다. 유럽 상인들이 이 지역의 도시에서 상업 활동을 하였고, 금, 비단, 향신료 등의 상품을 교환했습니다. 하지만 1415년에 포르투갈이 북아프리카의 주요 교역 중심지였던 세우타를 정복하면서 포르투갈과 이슬람 현지 주민들 사이에 무력 충돌이 빚어졌다.
사하라 사막 남부의 '흑아프리카(Black Africa)'는 일부 해안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내륙 지역이 외부에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 지역은 대체로 소규모 부족 단위로 잘게 나뉘어 있었고 말리 왕국, 송가이 왕국 등과 같은 크고 작은 왕국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현상이 반복되었다. 아프리카 내부에까지 서유럽의 세력이 뻗치는 것은 19세기의 일이지만, 해안지역은 15세기부터 포르투갈 탐험가들이 서부 해안 지역을 탐험하면서 무력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아메리카
15세기 말에 아메리카 대륙 전체적으로 수백만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산되지만, 그 가운데 80% 정도는 멕시코에서 페루에 이르는 고원지대에 모여 살며 마야, 아스텍, 잉카 제국과 같은 고도의 문명을 이루었다. 반면, 북아메리카 평원 지역, 카리브 해의 섬들, 남아메리카 내륙 등지에는 문명 발전 정도가 저급한 단계의 주민들이 사는 큰 대조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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